일상이야기/내메모
구룡포 속의 일본
나의도넛을지켜줘!
2010. 12. 5. 21:20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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비가 질퍼덕 하게 오던날 카메라는 제껴두고 핸드폰 카메라 하나 달랑 믿고 구룡포에 놀러갔습니다.
구룡포 속의 일본 가옥 이라~
호오~
<가옥 내부>
아래 글들은 여기 이 집을 관리하시던 아주머니께서 주신 책자 참조
-이 책자도 포항시사(1999년)를 짜집기 한거임-
구룡포에 가면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.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거류지였던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. 실제로 수년 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'여명의 눈동자' 의 일본거리 촬영 때 이곳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이 촬영 세트로 이용됐었다.
이 골목에 들어서면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 1900년대 초반 한국 속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. 이층 목조가옥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 차림의 여인의 "곤니치와!"하고 인사를 건넬 것 같은 느낌이다. 자동차가 겨우 지날 만큼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빽빽이 들어선 가옥은 낡고 빈 곳이 많았지만 느낌은 그대로 전해진다. ( 좁긴 좁았습니다.. 배추파는 트럭이랑 마주보게 되어 억지로 후진을 했었습니다 . 차는 다른데 주차하고 골목길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면서....)
골목 모퉁이에 몇 년 전 베어냈다는 나무전봇대 밑동이 고스란히 보인다. 가옥 뒷산은 일본인들이 손수 만든 공원이 있다. 가파를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이 나오고 그 안에 선원들의 무사고를 빌던 용왕당도 보인다.
1907~1910년경 영일군의 일본인 호구수는 대구부를 제외한 경북의 전 군 가운데에 제일 많은 숫자이다. 이는 포항과 구룡포에 많은 일인이 이주하여 산 결과이다.
당시 일인들은 주로 일정 지역에 밀집하여 취락을 형성 하였으며 총독부의 비호 아래 확장된 그들의 세를 이용하여 그 고을의 모든 이권을 탈취 운영해 갔다.
핸드폰 카메라라서 조금만 어두워도 잘 안찍혔어요.
그래도 약간의 기름값으로 여행같은 느낌을 받고 돌아왔습니다.
구룡포 속의 일본 가옥 이라~
호오~
<가옥 내부>
아래 글들은 여기 이 집을 관리하시던 아주머니께서 주신 책자 참조
-이 책자도 포항시사(1999년)를 짜집기 한거임-
구룡포에 가면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.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거류지였던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. 실제로 수년 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'여명의 눈동자' 의 일본거리 촬영 때 이곳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이 촬영 세트로 이용됐었다.
이 골목에 들어서면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 1900년대 초반 한국 속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. 이층 목조가옥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 차림의 여인의 "곤니치와!"하고 인사를 건넬 것 같은 느낌이다. 자동차가 겨우 지날 만큼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빽빽이 들어선 가옥은 낡고 빈 곳이 많았지만 느낌은 그대로 전해진다. ( 좁긴 좁았습니다.. 배추파는 트럭이랑 마주보게 되어 억지로 후진을 했었습니다 . 차는 다른데 주차하고 골목길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면서....)
골목 모퉁이에 몇 년 전 베어냈다는 나무전봇대 밑동이 고스란히 보인다. 가옥 뒷산은 일본인들이 손수 만든 공원이 있다. 가파를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이 나오고 그 안에 선원들의 무사고를 빌던 용왕당도 보인다.
1907~1910년경 영일군의 일본인 호구수는 대구부를 제외한 경북의 전 군 가운데에 제일 많은 숫자이다. 이는 포항과 구룡포에 많은 일인이 이주하여 산 결과이다.
당시 일인들은 주로 일정 지역에 밀집하여 취락을 형성 하였으며 총독부의 비호 아래 확장된 그들의 세를 이용하여 그 고을의 모든 이권을 탈취 운영해 갔다.
핸드폰 카메라라서 조금만 어두워도 잘 안찍혔어요.
그래도 약간의 기름값으로 여행같은 느낌을 받고 돌아왔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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